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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골의 꿈꾸는 소년 - 강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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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
작성일04-03-18 23:06 조회72,186회 댓글0건

본문

가 가수 강태웅을 만나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연하게\'였다. 모처럼 휴가를 받았다며 종로로 기어 나온 친구가 인사동 뒷골목으로 나를 불러냈다. 연봉이 어쩌고, 휴가비를 얼마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삼겹살을 열심히 뒤집었는데 고액연봉과 거리가 먼 나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끝없이 질질 늘어지고 삼겹살도 시커멓게 늘어붙어 타들어갈 즈음 룸 싸롱 언니, 영업부장 형님으로 보이는 분들의 집단회동이 몇 차례 있었다. 우리 테이블위에는 야시시한 미소를 뽐내는 언니의 사진 명함과 빨대가 꽂힌 요구르트, 사탕, 부채 같은 것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판은 제자리를 못 찾고 어수선하게 가고 있었는데 이번엔 웬 사내 한 명이 우리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시디사요!
네? 얼마인데요?
- 만 원요.
돈 없는데... 이거 누구 앨범인데 이렇게 팔러 다니세요?
- 제꺼요.
아저씨가 자기 앨범 직접 팔러 다닌다는 가수예요? 어디서 본 것 같더라.
- 저 알아요? 그럼 그냥 가져요.
예? 파는 걸 어떻게 그냥 가져요?
- 다음에 주시면 되죠.

 

강태웅과의 만남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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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가수였어? 그런데 왜 자기가 팔러 다니지?

친구는 방금 지나간 강태웅에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가수는 가수인데 텔레비전에도 잘 안나오는 가수라고 하자 ‘그럼 인기 없는 사람이네\'하며 곧 잔을 비우고 다른 화제로 돌아갔다. 나는 계속 강태웅의 앨범을 만지작거렸다. 내 마음한 구석에 강태웅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었다.(물론 소주 몇 잔의 힘도 무시 할 수는 없었겠지만) 나는 다른 쪽에서 시디를 팔고 있는 강태웅에게 달려가 명함을 건내며 말했다.
‘ 우리 언제 인터뷰 한번 하죠?\'
‘ 아, 예. 그러지요.\'
강태웅의 대답이 나오기 까지 0.5초도 지나지 않았다. 거의 동물적인 반사 신경이라고 말할 수밖에. 소주 몇 잔에 취기가 오른 나는, 순간 당황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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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웅의 시디를 들으며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는데 우리가 좀 늦게 만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방송, 신문 할 것 없이 강태웅을 ‘길거리 가수, 가객, 매니저 없는 가수’로 주목했었기 때문이다. 새삼 뒷북치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어찌되었든 한 주가 지난 뒤 홍대 앞 카페에서 강태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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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스케쥴이 빡빡하실 텐데 시간 내줘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할 때 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인터뷰이 신상파악하고 자료조사하다보면 무슨 취조하는 느낌도 들거든요. 강태웅 씨 살아온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요.
강> 뭐 나쁜 건 안 써있던가요? 하하. 신문에 제가 어렸을 때 머슴살이 했던 기사 때문인 것 같은데. 사실 산골 소년이 가수가 됐다 뭐다 해서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personweb.gif\"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을 배제하고 싶다는 겁니까?
강> 그렇죠. 제가 살아왔던 대로 여겨지는 것을 원하지 기자들이 마음대로 편집해서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은 원치 않아요.

personweb.gif\" 사실 가수 강태웅보다 인간 김덕희(강태웅의 본명)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가 솔직히 더 매력 있었거든요. 오늘은 이 둘을 적절하게 조절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 저는 몸부림치는 겁니다. 매력적인 건 없어요. 하하. 정말 극한 상황을 걸어온 거죠. 기자들이 저더러 매력적이라고 얘기 하는데 저는 속으로 그게 아닌데 아휴, 사람들이 왜 저러나 싶어요. 똑 같은 말씀하시네요.

기사 쓰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수 강태웅은 보지 못하고 강태웅이 된 김덕희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 경계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인터뷰 초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자신을 단순한 관심의 대상류로 몰아가기 원하지 않는 눈빛은 작년 연예계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공중파 방송과 신문이 파리 떼처럼 강태웅에게 달라붙어 집중 조명하고 난 뒤에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분위기를 정리하며 천천히 강태웅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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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웅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서울 외부의 사람들이 서울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가에 대한 것이었다. 서울에 첫 발을 디뎠던 많은 사람들이 꿈꾸었을 ‘서울드림’은 어떤 것이었는지 또 그것을 이루게 되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쳤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태웅은 서울에서의 삶보다 서울로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 역정이었는지 이야기 하고 싶어 했다. 어느 누구의 삶이든 단순 간단한 것은 없을 테니까.

강> 그러니까 제가 서울에 올라온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 거예요. 들어보세요. 처음에는 먹는게 해결되니까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읍내 이발소로 기술을 배우러 나갔어요. 그때가 열한 살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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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열한 살이라는 나이에 그런 것 생각하기가 힘들잖아요.
강> 왜 그러냐면 제가 3살 때 어머니가 집을 떠나시고 하면서 형님도 국민학교 4학년까지만 다니고 사회생활 했어요. 아버지하고만 생활한거죠. 아버지는 매일 술 드시고 동네가 떠나가라 노래 부르고 하셨는데 이상하게 부모를 한탄하기보다 아버지에게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는 거였죠. 처음에는 아버지가 나를 키웠지만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거였죠.

personweb.gif\" 열 한 살 나이에요?
강> 그렇죠. 그때 제가 집을 뛰쳐나와 머슴살이 하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때 아버지는 완전히 부양능력도 상실하셨고 술로 폐인이 되셨어요. 그래서 제가 빨리 돈을 벌어서 아버지를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물론 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안 되는 거였죠.
그래서 읍내로 나와서 이발소에서 8개월 정도 일을 했었는데 거기서는 월급을 안줘서 나왔어요. 근데 그때 월급은 없었지만 손님들이 팀을 줬어요. 10원 20원씩 주는데 이걸 가지고 저금을 하러 갔었어요. 근처에 농협이 있었는데 그 10원씩 팁을 받으면 바로 뛰어가서 저금을 하는 거예요. 그때 농협 직원 누나랑 친해가지고 제 통장 관리를 해줄 정도였어요.
장이서는 날은 정말 바쁜데 그날 끝나면 주인이 100원을 줘요. 월급은 없고 일당도 아니고 뭐 사먹어라 하면서 100원을 주는 거죠. 그럼 그걸 안 쓰고 저금해서 8개월 동안 모은 게 만 삼천 원이 됐어요. 그때 큰 결심을 하면서 아저씨한테 말을 했죠. 왜냐면 근처 이발소 있는 애는 나랑 나이도 같은데 머리도 감기고 빡빡머리도 깎으면서 월급 삼천 원을 받는 거예요. 근데 나는 안받으니까 기분이 그렇잖아요. 그래 큰맘 먹고 ‘아저씨, 나도 월급주세요’ 하니까 주인아저씨가 막 패더라고요. 문을 잠그고 장작으로 무릎에 피가 나올 정도로 막 패면서 ‘니가 무슨 월급이냐’ 고 해요. 먹여주고 기술 가르쳐주면 됐지 무슨 월급이냐면서 무지하게 맞았어요. 요새 외국인 노동자 보면 그때 생각나죠. 제가 너무 아파서 집으로 도망갔어요. 그때 충북 광혜원이라는 곳에서 양복점에서 꼬마를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 했어요.

personweb.gif\" 어린 나이에도 정보가 굉장히 빠르셨네요. 그런데 왜 양복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강> 읍내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정보교류가 빨랐던 거죠. 그 양복점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이발소에서는 매일 물 만지니까 손에 습진도 생기고 월급도 안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양복점은 그것보다 깨끗하니까 가려고 했던 거죠. 그 때 아버지가 이발소 주인을 혼내러 오셨거든요. 그 틈을 타서 이발소 방에 들어가서 짐을 싸서 버스타고 읍내를 날랐죠. 광혜원이라는 곳인데 여기서도 3개월 밖에 일을 못했어요. 여긴 월급도 안주고 그렇게 기술자가 때려요. 아휴, 사람들 왜 그래요? 그때 서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죠.
아버지한테 뭘 해드리려고 했는데 이게 잘 안되더라고요. 이발소에 있을 때 벌은 돈 만 삼천 원 드리고 서울로 온 거죠. 뭐, 무작정 온 거죠. 그 땐 용산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리니까 갈 데도 없고 해서 ‘미싱사, 시다 구함’같은 광고를 보고 76년 3월 1일에 장갑 공장에 들어갔어요. 거긴 한달 월급 2만 5천원 준데요. 월급타면 아버지 맛있는 것 사드리고 그 돈으로 아버지 생신 때 내려가겠다고 편지를 보내 드렸는데 제가 서울 오고 두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 편지를 받아보신 다음 날 돌아가셨대요. 5월 8일 어버이 날인데. 나중에 동네사람들한테 들었는데 아버지가 그 편지를 받아보시고 그렇게 좋아 하셨대요. 우리아들 서울 가서 온다고 동네사람들한테 자랑하고 그러셨다 던데.

personweb.gif\"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진 건 언제였습니까?
강> 그건 양복점에 있을 때였어요. 그 때 조용필씨 ‘돌아와요 부산항에’하고 하수영씨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그리고 ‘나훈아’씨를 봤어요. 특히 나훈아씨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 분 노래 고향에 대한 정서가 많이 있잖아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서울에 올라온 이유는 가수가 되겠다는 거였어요.

personweb.gif\" 서울로 올라갔을 때 시골에서 가졌던 생각들이 변하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사실 시골에서 너무 힘든 일을 당한 것 같네요.

02_06.jpg\"강> 시골에서 당한 걸 떠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컸잖아요. 시골에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지내던 추억을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이후에 고향이 안식처가 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단지 서울에 왔을 때 힘들고 그런 것 보다 무조건 신기한 거죠. 차를 탔는데 미루나무가 내 뒤쪽으로 막가는 거예요. 또 공중전화가 있다고 하길래 공중전화가 어디 있냐고 하늘 쳐다보면서 다녔어요. 산골짜기가 전부 인 줄 알았는데 읍내로 나오면서 세상구경을 했는데 서울로 오니까 더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거죠.

personweb.gif\" 그래도 서울에 올라와서 좋은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잖습니까?
강> 그렇죠. 공장에 있을 때 월급을 안줬어요. 지금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말이죠. 그때 열 두 살이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네요. 그때 함께 일하던 누나들이랑 같이 노동청에 갔었어요. 원래 근로기준법상 저처럼 어린사람을 고용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시켜놓고 월급을 안주니까 같이 간 거죠. 그런데 노동청에서 해결을 안 해 주더라고요. 너무 억울해서 그 사장 집 앞에 가서 며칠 밤을 엉엉 울었어요. 그래도 해결이 안돼서 결국엔 그 공장을 나왔죠.

personweb.gif\"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생기지는 않았나요?
강> 불신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일을 시켜놓고 돈을 안 줄까? 하는 생각은 했었어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가수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 있어야 된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personweb.gif\" 드라마틱하네요. 실제로 강태웅 씨의 살아온 이야기가 드라마로 꾸며져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였어요?
강> SBS 인생대역전이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제가 살아온 가장 큰 라인만 잡아 나갔죠. 양복점이나 서울 올라와서 공장 다니던 얘기는 빼고 가수가 되기까지 이야기만 했죠.

personweb.gif\" 그 드라마 주제가도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가수 강태웅을 알아보고 했을 텐데 소위 ‘떴다’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까?
강> 저는요. 오히려 거기에다 제 마음을 맞추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텔레비전엔 안나가려고 했어요. 그 프로그램에 안나가려고 두 달 동안 버텼어요. 저는 음악만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것보다 들어서 좋은 그런 음악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라디오 위주로 활동한 거였죠. 텔레비전 작가랑 얘기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때가 2001년인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회가 어려운데 강태웅 씨 같이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내보내면 많은 시청자들이 감동을 받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설득을 당했는데 두 가지만 해달라고 했어요. 대역이 나와서 연기를 하는데 중간 중간에 실제 인물이 나와서 인터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최소한 적게 나가게 해달라고 했어요. 다섯 번 나가면 두 번만 나가게 해달라고 한거죠. 얼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두 번째는 나이. 실제 주인공들을 비출 때는 거의 나이를 써줘요. 그런데 저는 나이를 빼달라고 했죠. 왜냐면 우리나라사람들 그런 것 있잖아요. 그 가수가 나이 많고 어쩌고 하면 괜히 이상하게 봐요. 음악적인 걸로 안 봐주고 이상한 기준으로 사람을 본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이를 빼서 나간 거죠.

personweb.gif\" 사실 언론이라는 게 단물만 빨아먹고 쏙 빠지는 것 같죠. 계속 이어주지도 못하면서 바람만 넣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수 활동 할 때 이미지가 중요한데 ‘강태웅은 이렇다.’ 라고 규정지어지면 때론 그것이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잖아요.
강> 그런데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그분들 나름대로의 최선의 방법인 것 같더라고요. 저를 책임지거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강태웅의 살아온 과정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로 다루어지면서 그야말로 인생대역전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가수 강태웅의 음악적인 면보다 가십거리로 다루어진 길거리 가수의 삶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된다는 것이 가수로서 벗어나기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강태웅은 언론에 대한 섭섭함을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내고 있었다.


personweb.gif\" 서운하지 않으세요?
강> 물론 그런 것도 있지요. 하지만 좋게, 고맙게 생각해요. 인생대역전이라는 프로그램에 주제가를 어떻게 부르게 되었냐면 담당 PD님께 고맙다고 카드를 보냈어요. 참 인간적인 분이시라고 그런데 그분은 지금까지 그런 것 받아보신 적이 없었나 봐요. 그래서 식사초대 받았고 얘기하다가 주제곡 얘기가 나왔던 거죠. 다른 사람들은 주제곡 하나 하려면 로비도 하고 돈도 주고 그러는데 전 그러지 않았어요. 제가 그냥 만들어서 갖다 드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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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작년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올해는 어쩐지 썰렁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강> 썰렁한 게 아니라 제가 오히려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때 이후로 여러 기획사에서 많이 연락 왔는데 제가 준비된 것만큼만 보여드리려고 그러지 않고 있어요. 대부분의 연예인들을 보면 금방 떴다가 금방 사라지는데 제가 준비 된 것만큼만, 제가 보여 드릴 수 있는 부분 만큼만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죠. 실제 제 모습이 아닌데 부풀려서 하는 건 정말 힘들고 못하는 거죠.
앨범 홍보하러 거리를 다니는 이유도 그런 것 때문인 것 같아요. 방송을 많이 나가다 보면 마음이 붕 뜰 수도 있는데 홍보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가수를 꿈꾸던 시골 소년은 어느 날 갑자기 주목받았고 실제로 방송에 나오는 가수가 되어 있었다. 그 큰 바람은 강태웅 앞을 지나며 때로는 하늘로 붕붕 띄우기도 했다가 바닥으로 냅다 곤두박질시키기도 했다.
그 바람 앞에서 가수 강태웅은 자신이 만든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바람을 원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바람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쪽에서 불어왔고 이제 다시 꿈꿔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자리를 굳히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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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남들이 보기엔 그런 여건 속에서 가수를 꿈꾼다는 것이 정말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세요?
강> 음, 큰 전환점이었던 때가 방통대 법학과 다닐 때였어요. 수덕사라는 절에서 사법고시를 공부 하다가 그만두고 내려왔죠. 왜냐면 어릴 때부터 가수,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엉뚱한 걸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감하게 접고 새벽에 도망 나왔어요. 밤에 캄캄한데 산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개가 막 짖는 길을 내려와서 읍내에서 국밥 한 그릇 먹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죠.
하지만 서울에 올라와도 갈 데가 어디 있었겠어요? 서울역 중앙일보 신문 보급소에 들어가서 신문 팔았죠. 그렇게 하면서 다시 음악을 하려고 했죠. 낮에는 남산에 왔다 갔다 하면서 신문 팔고 저녁엔 홍보하러 다녔죠.

personweb.gif\" 법대를 그만두면서 까지 음악을 하려고 했던 이유가 뭡니까?
강> 음악에 대한 꿈이 간절했기 때문이죠.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그때 집 나가셨던 어머니를 찾았거든요. 어머니를 찾고 나니까 경제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법대를 갔던 거였죠. 하지만 그것보다 내 꿈이 더 중요하다고 다시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별것 다한 거죠. 현실적인 문제 해결해 가면서 내 꿈을 이루려 했으니까요.

personweb.gif\" 살아가는 데 그게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라는 거요.
강>; 아. 참 저는 바보 같았던 것 같아요. 누가 봐도 보이지 않는 건데

personweb.gif\" 주위에서 누가 말리지 않았어요?
강> 주위에 누가 없었어요. 저 혼자였잖아요.(웃음) 그래도 어린나이에 그게 행복한 거예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요. 제가 2년 동안 초,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 공부한 것도 가수 해야겠다는 집념 때문에 한 거예요.

personweb.gif\" 많이 외로웠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강> 외로움이 많았죠. 그것이 이제는 제 삶의 내면 깊숙이 들어왔어요. 그랬기 때문에 더 음악에 빠졌는지도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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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음악이 일종의 도피처였겠어요?
강> 도피처라기보다 음악을 하면서 제 안에 있던 외로움을 달래고 풀어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의 감성이라는 것이 자극적인 행위를 하면서 풀어지는 거잖아요. 특히 노래는 다른 것에 비해서 빨리 오는 것 같죠.

아무도 없는 서울. 혈혈단신으로 살아가며 만났던 수많은 외로움을 쏟아낼 것은 노래밖에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 든다. 사람을 좋아하고...등등.. 인터뷰를 시작한지 한 시간이 지날 즈음 강태웅이 가졌던 경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가수 강태웅의 음악세계에 대해 묻기로 했다.

personweb.gif\" 가수는 대중들과 만나야 하고 보다 대중들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 뒷받침해주는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운영해 오신 겁니까?
강>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가능했냐면 음악도 다 제가 만들었고 제작도 제가 했기 때문이죠. 기획, 홍보 까지 제 손으로 하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이건 기획사나 다른 데에서 다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혼자 다 했기 때문에 존재 할 수 있던 거죠.
방송이나 신문에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강태웅’ 이렇게 하고 있다고 직접 보고를 했어요. 그때 마침 연예계 비리 터졌는데 제 얘기가 기사로 쓰기 좋잖아요. 매니저 없는 가수 이렇게 말예요.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꾸었던 꿈을 현실로 이룬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거죠.

personweb.gif\" 노래하는 게 가장 큰 행복이다?
강> 그렇죠. 어제도 한강 고수부지 가서 공연했어요. 차에 스피커, 엠프까지 있어요. 그거 켜놓고 몇 사람들 모인데서 공연했어요.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자꾸 시간이 갈수록 더 느끼는 거잖아요. 아시겠지만 98년에 데모 테잎 만들어서 홍보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태웅씨 이 노래 좋은데 앨범 안 나오냐고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씨디가 만들어 진거죠. 그 씨디 만들면서 2년동안 거리 홍보를 했어요. 방송에 간 이유도 팬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어요.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홍대나 신림이나 피맛골을 돌면 하루에 사백 명 정도를 만나는데 그중 한 오십 명은 아는 사람 이예요. 그 사람들이 제 노래 들어봤다면서 강태웅씨 ‘이별하지 않은 이별’방송에 신청했더니만 왜 안 나오냐고 막 따지고 그래요. 나중엔 스트레스 쌓이더라고요. 진짜.
그래서 고민을 했어요. 2001년 6월에요. 제주도로 무전여행을 갔다 왔는데 마음에 준비를 하려고 했던 거예요. 내가 방송에 아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장르도 만들어야 하는데. 갔다 와서 마음정리하고 음악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임감도 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 스스로 자신감도 갖는 거죠. 내 노래가 괜찮구나하는 마음가짐도 되고요. 이제 알려야겠다는 마음먹고 방송 찾아다닌 거죠. 처음엔 방송에서 본체만체도 안하다가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알려진 거죠.

personweb.gif\" 평범한 사람들이 가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절대 이해 못하겠어요.
강> 진짜 이해 못해요. 가수가 무슨 씨디를 팔러 다니고 홍보하러 다녀요?

강태웅은 시디를 팔러 다닌다고 말하지 않고 꼭 홍보하러 다닌 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돈을 주고 파는 앨범이지만 자신이 만든 음악을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홍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홍보하러 다니면서 음악을 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만들고 대중들을 설득시켜 나가는 것이다.

personweb.gif\" 홍보 다니다 보면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강> 감동적인 에피소드는 86, 87년부터 음악을 하려고 기타 매고 초콜릿을 팔러 다녔어요. 노래공부도 하고 가수가 되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초콜릿 팔러 다닌다고 말을 하면서 다녔죠. 그때 거리에서 만난 분들을 지금 많이 만나요. 그러면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기타 폼으로 가지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하면서 놀라는 분도 계시죠. 그 초콜릿 팔러 다닐 때 돈 없다고 하시면 그냥도 주고 그랬거든요. 그때 제 맨트가 뭐냐면 ‘아저씨, 이거 그냥 먹을 거예요? 아니면 돈 주고 사서 먹을 거예요?’였어요. 돈 없다고 그냥 먹는다고 하면 그냥 주고 갔어요.

personweb.gif\" 인사동에서 저 만나셨을 때 그랬잖아요. 씨디 사라고 해서 돈 없다고 하니까 그냥 주셨어요.
강> 그랬어요? 하하. 아무튼 거리에서 만난 분들은 제 모습이 너무 당당하고 멋있었다고 하세요. 초콜릿 팔면서도 싸인 해주니까 나중에 정말 잘 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89년도에 만난 어떤 분은 여자친구가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즉석에서 ‘let it be me\'라는 노래를 불러드렸는데 얼마 전에 그 분을 만났어요. 거의 15년 이상 되었는데 둘이 결혼 하셨더라고요. 저를 텔레비전에서 봤다면서 정말 만나고 싶었다고 정말 반갑다고 하세요. 제가 물어봤죠. 아저씨 그때 초콜릿 몇 개 샀어요? 하니까 한 열 개 샀대요. 그래서 씨디 그냥 가지라고 했어요. 삼백 원 이백 원짜리 천 원에 팔았으니까 그냥 드린 거죠. 그렇게 저의 지나온 흔적들을 발견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참 즐겁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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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데모 앨범 만들었을 때 지방 내려가서 모니터링도 했다고 들었는데 처음에 반응이 어땠습니까?
강> 97년에 데모 앨범을 만들었고 방송활동한건 2001년 11월부터 시작했어요. 처음에 초콜릿 팔다가 데모 앨범 파니까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게 내 모습이잖아요. 너무 떨렸어요. 과연 사람들이 이걸 살까? 모니터 해도 될까? 하면서 떨고 그랬거든요. 근데 예상외로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속초를 갔었는데 사람들한테 서울에서 속초까지 홍보하러 왔다고 하면서 시내를 들어갔어요. 그런데 한 시간 만에 테이프 육십 개 정도가 나갔어요.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더 반응이 좋은 거예요. 시골 분들이 인간적인 면이 많잖아요. 강남에 갔을 때는 강남 애들도 막놀래요. ‘야, 가수가 직접 홍보하러 다닌다.’면서 막 몰려들더라고요.
10년 동안 초콜릿 팔다가 이제 데모앨범 가지고 홍보하니까 제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았어요. 게다가 ‘사람들이 정말 만들었네요?’하면서 놀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행복했죠.

personweb.gif\" 그때 초콜릿을 팔아주었던 사람들도 자기도 한 보탬 했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아요.
길에서 만들어졌으니까 길에서 나누겠다는 말로 들리네요.

강> 예.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관심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고 호흡할 수 있는 것이 변하지 않는 저의 철학이라면 철학인 것 같아요. 만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도 많이 봤고 노래도 나오는데 왜 이렇게 씨디를 팔러 다니냐고 물어요. 그럴 땐 이렇게 얘기해요. 방송에 나와서 노래하는 것도 가수겠지만 어느 분이 제 음악을 듣는지 확인하는 것도 가수가 해야 할 일이라고요. 다니면서 영감도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아있는 모습이 이런 건데 그걸 뺏기기 싫다는 거죠. 방송하는 것 하고 직접 부딪히는 것하고 기분이 달라요. 예술이라는 것은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에 직접 부딪쳐야죠. 또 제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personweb.gif\" 처음에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강태웅과 지금 가수 강태웅과 달라진 면이 있지 않나요? 처음에 꿈꿨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 말입니다.

04_02.jpg\"강> 가장 고마운 건 그 옛날의 꿈이라는 것이 지금 현실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그것이 내 모습이 되었다는 겁니다. 직장에 다닐 때 노래가 부르고 싶어서 일이 끝나고 20,30분밖에 못했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시간을 제가 만들어 온 거죠.
그때와의 지금의 차이점이라면 과거엔 혼자 했었는데 지금은 혼자가 아니 팬도 있고 사람들이 인정을 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음악인으로 가지는 책임감이 생겼지요.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요. 음악인을 꿈꿔왔고 지금 스물 네 시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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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만나는 시점과 계기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나도 한때 음악을 한답시고 까불던 때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학교 노래패를 할 때였다. 지하 동아리 방에서 한 두어 시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다 노래에 취하고 가사에 감동해서 눈물도 찔끔 흘리고 나면 머리가 멍해지고 속이 후련해졌었다. 꽃다지가 부럽지 않았고 안치환, 김광석이 부럽지 않았던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것이다. 뭐 노래운동보다 카타르시스, 배설, 욕구해소, 욕망의 미끄러짐으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나 싶지만 아주 가끔은 노래를 팔아 밥을 먹고사는 삶을 꿈꾼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그 고된 생 노가다의 바다에 몸을 던질 자신이 없었던 거였지. 물론 실력도 시원찮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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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저도 언젠가 가수의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접었어요.
강> 그래요? 그거 정말 쉬운 거 아니예요.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제가 온 길이 바보 같고 전설 같고 어떻게 버텨왔는지 모르겠어요.

personweb.gif\" 후배들이 있다면 내 길을 따라오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강> 저는 그걸 떠나서 제가 가야 할 길을 간 거죠. 음악인으로서의 자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personweb.gif\" 물론 음악적 자질도 중요하겠지만 어렵게 해야만 이정도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후배들에게 말해 줄 수도 있을 텐데.
강> 본인이 원한다면 해야죠. 저는 저하고 약속한 게 있어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고 내가 음악을 하면서 생기는 어떤 어려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초콜릿을 팔던 뭐를 팔던 재미있고 편하게 포용할 수 있었던 거죠. 사람이 하나를 선택하게 되니까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사람이 그런 자세가 안 되면 많이 삐걱거리죠. 강의 나가서도 애들한테 그런 정신적인 이야기를 해요.

personweb.gif\" 잘 알아듣나요? 그런 정신적인 얘기나 전설 같이 살아온 얘기.
강> 아휴, 딴 데 보고 있죠. 뭐. 그냥 분위기 봐서 이야기해요. 하하.

personweb.gif\" 흔히 요즘가수들이 실력보다 기획사 잘 만나거나 돈이 많아서 가수가되는 경우 만들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도 못하는 가수 보면 화가 나던데요.
강> 저도 그럴 때가 없는 건 아니죠. 하지만 저는 제가 처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한거였어요. 사람들이 위치해 있는 자리가 다 다르잖아요.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최선의 삶을 살고 있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가 살아왔던 때와 지금의 음악적인 세대가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후배들에게 그런 정신은 얘기해주되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personweb.gif\" 음악인으로서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네요.
강> 적어도 음악인, 가수라면 싱어송 라이터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래만 부른다는 건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약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노래라는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메시지 같은 것이거든요. 자신을 표현하는 건데 갖출 건 갖춰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야 생명력도 길고 가수로서도 오래 갈수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실패 하더라도 다시 일어 설수 있고요. 그런데 노래만 할 줄 알면 힘들어요. 계속 삐걱삐걱하고 누구 눈치봐야하고 음악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안 커나가는 것 같아요.

personweb.gif\" 음악인으로서 자존심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매니저는 절대 못 구하시겠습니다.
강> 그래서 제가 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매니저가 생기면 교육 시킬 수도 있죠.

personweb.gif\" 매니저가 가수를 잡고 휘두르는 것보다 가수가 중심이 되어서 매니저를 움직인단 말이죠?
강> 그렇게 돼야죠. 방송 다니면서 기분 나쁜 게 매니저들이 저한테 선생님 선생님한단 말이예요. 매니저들의 꿈이 가수하나 잘 잡아서 곡 받아서 음반 제작하는 것이거든요. 그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저한테 한 곡 받아볼까 하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요. 전 이런 게 싫거든요. 안타까운 게 이런 거죠.
제 생각엔 음반제작이나 기획까지도 가수가 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존의 사업가가 아니라 가수가 직접 해야 모든 걸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거죠. 음악 하는 사람이 더 인정받고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몇 몇 방송 피디들 알고 지내면서 음악 틀어 달라고 하는 것 보면 속이 우글우글 그래요. 소위 똥 폼을 잡고 있는 애들이 많은데 너무 각을 잡고 다닌단 말예요. 그게 나중엔 상처를 받게 되지요.

personweb.gif\" 너무 어린 사람들이 가수를 한다고 하는 걸 보면 어떤 걸 생각하세요?
강>; 그만큼 진로에 대해서 빨리 감지했다고 보기 때문에 좋게 생각해요. 일단 자기가 해 볼만큼 해봐야죠. 그래야 미련이 없거든요. 그리고 제가 강의 나가는 학원 같은 경우는 한달 수업료가 이백 오십 만원예요. 그럼 부모들이 얼마나 헐떡거리겠어요? 그걸 아는 학생들이니까 나름대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그 친구들한테 지금은 아마추어이지만 프로가 되기 위해선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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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중반으로 접어들 때 즈음 정말 궁금한 게 있었다. 먹고는 살만 한지 아니면 고생해서 번 돈을 무작정 때려 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으려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돌려 말했다.


personweb.gif\" 생활전선에 이상 없으신지?
강> 하하. 이상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앨범 홍보하면서 팔고 있고 저작료라는 것도 받고 있어요. 제 앨범 중에 ‘파이팅’이나 ‘이별하지 않은 이별’이 방송에 나오고 있고 노래방 같은데 노래가 있으니까 그쪽에서 저작료를 받고 있지요.

personweb.gif\" 홍보하면서 앨범 판매하는 게 가장 크지 않나요?
강> 그렇죠. 그게 제일 커요. 제가 돈에 욕심이 있다면 한 달에 천 만원정도 벌을 수도 있어요. 한 번 나가서 한 두 시간 정도 하면 이십 만원 정도 버니까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뭘 못하겠어요?

personweb.gif\" 음악 할 수 있는 여건은 마련이 되는군요.
강> 지금은 너무 좋죠.


내가 꿈꾸는 세상


때론 슬픔에 기대어 하얀 밤을 새운 날들이
이젠 별이 되어 저 하늘에 흐르고 있어
나 자유롭고 싶어 떠나온 고향의 언덕이 지금도 그리워
차가운 거리에 나만의 꿈을 꾸곤 했었지
지친 어제는 잊고서 내 영혼이 바라는 대로
내 노래로 세상을 채우고 싶어
난 자유롭게 날고 싶어 내게 열린 세상을 보고 싶어
내가 원하 사랑을 위하여
꿈이 있던 날들을 기억해줘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어릴 때 보았던 저 하늘의 별이 오늘도 내 곁에 흐르네.

 

장르?! 레드제플린, 스콜피온스, 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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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대중음악이라는 게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 인맥, 음악적 계보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그런 것이 있어서 끌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까?
강> 제 음악에 확신을 갖기 때문에 일단 음악으로 인정만 받으면 어디든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시간이 필요하고 인간적인 교류가 있어야겠지요. 저는 그 인간적인 교류를 쌓으려고 일 년 동안 음료수를 방송국 피디들한테 돌렸어요. 기억해 달라고 말이죠. 왜 그랬냐면 아무리 제가 음악을 만들고 해도 피디가 들어주지 않으면 방송에 나가지 않을 거잖아요. 그래서 피디들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저 스스로를 설득시켰죠. 자존심 상해도 피디가 들어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거니까.
6개월 정도 그 생활을 했는데 어떤 피디 분이 보시더니 앉아보래요. 누구 매니저 하냐고 묻더라고요. 저를 매니저로 안거죠. 자기도 매일 음료수를 받아 마시고 그러면서 매니저 치곤 참 성실하다고 생각 했었나 봐요. 그래서 6개월 전에 씨디 드렸다고 했더니 지금 없다고 그래요. 다시 씨디를 줬죠. 그랬더니 바로 다음날 노래를 틀어 주더라고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렇게 피디들이 알아가게 되더라고요.

personweb.gif\" 계보, 장르끼리 뭉쳐 있는 일종의 기획사, 패밀리가 있잖아요? 반면에 강태웅 씨는 혼자 일하고 있잖아요. 음악적인 고독감이 있을 것 같아요.
강> 저도 저만의 패밀리가 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어요. 서로 도와주고 음악활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도 있고요. 음악자체가 좋지 그런 집단적인 것에는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아요. 거기가 마음 뺏기는 게 우습다고 생각해요.

personweb.gif\" 어떤 장르를 계속하고 싶으세요?
강> 장르라는 것이 애매한 표현의 차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2집을 모던 락이나 락 발라드 분위기를 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때그때마다 표현하고 싶은 장르가 있는데 앞으로도 락 발라드 쪽으로 갈 것 같아요.

personweb.gif\" 음악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유행일 수도 있거든요. 락 발라드 같은 경우는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음악의 흐름 속에서 좀 둔감한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 제가 락 발라드라고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거나 머물러 있는 편곡이 아니죠. 시대에 맞는 락 발라드는 분명히 있는 거예요.

personweb.gif\" 대중이 무섭다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강> 대중이 무섭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시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제가 좋아서 하는 음악이 인기를 좇고 싶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중요한 건 내 색깔이거든요. 인기가 많고 적고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음악이 삶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기획사가 없고 매니저가 없기 때문에 저 혼자서 하는 게 좋습니다.

personweb.gif\" 오히려 전문 기획자가 붙어서 음악에 대한 흐름을 코치해 주신다면 더 발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 주변에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있어요. 같이 얘기도 하지요. 흐름대로 가되 저만의 색깔이 있는 쪽으로 가고 싶은 거죠. 요즘에 고민하는 것이 가사예요. 저한테 맞는 가사가 있거든요. 그런 가사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last love
(http://www.kangtaewoong.com 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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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자신의 음악은 대중음악과 예술음악 중 어디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 제가 추구하는 음악이 대중음악 쪽이잖아요.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음악성을 추구하려하고 있어요. <당직골>이라는 노래는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제가 꿈꾸는 세상을 표현한거죠. 제가 판단하는 저의 음악은 대중적인 것 반 순수예술적인 것 반 정도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대중적인 것으로 가다보면 그 사람만의 색깔을 잃는 것일 수도 있겠고 너무 대중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작업하면서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느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많은 사람이 호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빙고. 하긴 사람들의 입맛에 다 맞는 음악이 어디 있겠나 싶다. 내 취향이 아닌 음악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personweb.gif\"그런 코드를 찾아내는 것이 당면한 문제인 것 같네요. 어떤 음악 많이 듣는 편이세요?
강> 프로그레시브니 메탈, 재즈, 블루스, 아트락 같이 장르에 구분 없이 많이 듣는 편이예요.

personweb.gif\" 한국 음악의 흐름을 알아보려면 예전에는 홍대 앞 클럽들이 주된 역할을 담당했었습니다. 이곳 음악들이 무시하지 못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음악평론가들도 이곳에 나와서 흐름을 읽기도 하고요. 혹시 홍대 근처에 나와서 음악적 소스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강> 여기 나오는 이유는 분위기가 편하고 그 전부터 거리공연을 이쪽에서 해왔기 때문에 분위기가 익숙하고 여기저기서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요.

personweb.gif\" 영향을 준 뮤지션이 있다면?
강> 스콜피온스, 레드 제플린 좋아해요. 비틀즈.

personweb.gif\"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닿고, 한국 사람들만 특히 좋아하는 그룹들이네요.
강> 정서가 와 닿는 것 같아요. 정서를 무시 못하죠. 저도 약간 밝은 쪽보다 슬픈 정서를 표현해 내기가 편한 것 같아요. 왜냐면 그런 쪽도 있어야 하잖아요. 밝은 사람들은 밝은 거 하고 있으니까..

personweb.gif\" 1.5집에 라틴풍의 이라는 노래 말고도 꼭 락 발라드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던데요.
강> 1.5집 같은 경우는 장르가 꽤 다양한 편인데 그건 모니터링 하면서 그 사람들이 좋다는 것만 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장르가 그렇게 다양해 진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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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혹시 <코요테 어글리>라는 영화 보셨어요?
강> 아뇨, 요즘 통 영화를 못 봤어요. 꼭 봐야겠네요.

갑자기 코요테 어글리 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매력적이지도 않고 별 재주도 없는 여배우가 싱어송 라이터로 성공하는 모습을 그린 전형적인 헐리우드영화인데...강태웅을 보면서 왜 그 영화가 생각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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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강태웅이라는 이름요. 강백호하고 서태웅을 합쳐놓은 거라면서요?
강> 원래 앨범 타이틀을 ‘포르쉐 ’라는 곡으로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약간 강인한 분위기로 가려고 삭발을 했는데 제 이름이 약간 여성스럽더라고요. 김덕희.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그때 유행했던 강백호 서태웅을 합친거죠.

personweb.gif\" 슬램덩크 팬이세요?
강> 아뇨. 전 그 만화 한 번도 안 봤어요. 씨디 1집 작업 같이 하시던 분하고 같이 음악 하시던 형이 만들어 준거죠.

personweb.gif\" 불만은 없으셨어요? 이젠 바꿀 수도 없는데.
강> 글쎄 이름이 약간 강한 것 같기는 해요. 제 원래 이름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좀 아쉬워요. 강산에가 강영걸로 나왔던데 저도 나중에 김덕희로 나오고 싶긴 하죠.

강산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깐 틈을 봐서 여자친구가 있냐는 둥의 사생활을 캐물었지만 뭐 그런 걸 물어보냐며 면박을 주었다. 역시 가수들은 사생활 밝히는 것에 민감한 것 인가? 민망하기 짝이 없어 근황을 좀 더 묻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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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web.gif\" 2집 준비는 잘되고 계십니까? 기대가 되는데요.
강> 뭐, 그냥 똑같은 음악이죠. 하하. 계속 낮에는 방송, 강의 하고 있고 밤에 주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원래 올 가을에 내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서 30%정도 됐어요. 원래는 올가을에 내려고 했는데 좀 신중해지더라고요. 가사 같은 것도 수정 작업하다보니까 좀 늦어질 것 같아요.

personweb.gif\"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낮에는 대학로에 있는 실용음악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요. 방송도 가끔 출연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강의를 하지요. 대부분 낮에 주로 하는 게 제 앨범 홍보하고 방송관계자 만나고 저녁에 강의 하고 강의 없는 날은 홍보하러 다니지요.

personweb.gif\" 홍보는 주로 몇 시간이나 하세요?
강> 한 두 시간 정도 다녀요. 인사동이나 홍대도 돌지요. 지방방송 하러 가면 지방에서 홍보하는 거죠. 지난주에 속초 가서 하고 왔어요. 저는 어디 가서도 홍보해요. 그렇게 다니면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텔레비전에서 안나왔냐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personweb.gif\" 하루일정이 생각보다 빡빡할 것 같네요.
강> 보통 서 네 시간밖에 못 잘 때가 많아요. 어젠 밤을 새우고 오전에 두 시간 잤어요. 작업 때문인데 제 것도 하지만 다른 사람 것도 해주고 그래요.

personweb.gif\" 스스로에 대한 음악평을 해보신다면?
강> 늘 완벽한 것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늘 아쉽죠. 이번 2집에서 어느 정도 마음에 차는 작업을 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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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강태웅은 약간 상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은 풀어진 것인 어떤지는 모를 일이었는데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보였다.

personweb.gif\"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을 텐데 제가 짚어내지 못한 게 많은 것 같습니다.
강> 에이. 뭐 하고 싶은 말은요. 전 사실 음악적인 얘기를 주로 하고 싶었어요. 워낙 사람들이 집안 얘기를 많이 묻다보니까 좀 그러네요. 저의 팬이 되면 개인적인 얘기에 스스로 관심도 갖게 되고 그럴 거잖아요. 가급적이면 음악적인 모습으로만 비쳐지고 싶어요.

personweb.gif\" 지금까지 언론에서 만들어왔던 강태웅의 모습은 개인사에 조명을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음악적인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큰 짐일 것 같습니다.
강> 제가 대중을 의식하면서 음악 하는 게 아니고 음악 속에서 제가 행복하기 때문에, 음악으로 큰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없고요.

personweb.gif\" 진짜 돈벌고 싶지 않으세요?
강> 하하. 진짜예요. 사람들이 제 음악 듣고 좋아하면 저도 좋은 거죠. 저는 돈이나 인기 같은 것에 제 음악을 빼앗기기 싫어요. 창작하는 사람한테 가장 소중한 것을 그것들에게 빼앗기게 되면 그게 가장 무서운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게 아닌데. 단지 음악이 좋으면 나머지 것들은 따라오는 것들인데 괜히 돈에 인기에 맞추려고 하는 모습들.

personweb.gif\" 강태웅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일단 인간 김덕희를 알고 강태웅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강> 음악인으로서의 자유로운 모습으로 비춰 주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쫓아가는 길을 갔다면 지금 음악인이 안됐을 거예요. 그 마음을 뺏기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직골>같은 순수한 생각을 지키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요. 하지만 그게 행복한거예요. 또 음악이 저의 정서를 순수하게 만들어주고 있죠. 그래서 음악이 좋아요.
홍보하다가 앨범 샀던 사람을 만날 때 음악 어땠냐고 물어 볼 때 ‘강태웅씨 이거 의외로 괜찮데.’ 하면서 일년 전에 샀던 시디를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그게 가장 기분 좋은 일이죠. 앨범도 들어보지 않고 샀지만 제가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샀다는 그게 좋은 거예요. 그럼 됐지 뭐.
제가 계속음악을 할 것이기 때문에 팬이 한 명 두 명 늘게 분명하고 또 그 분들이 아, 강태웅 만의 음악색깔이 있다고 해줄 수도 있는 거지요.


personweb.gif\" 언제까지 음악을 하실 거냐고 물어봐도 되죠?
강> 저는 음악이외에 다른 거 생각한 게 없어요. 앞으로 음악을 평생 할 거고 다른 것을 해도 음악과 관계되는 제작 같은 걸 하고 싶어요. 제가 거리 공연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세요? 우리나라사람들은 정서가 상당히 메말라 있어요. 그것 때문에 사건 사고도 많잖아요. 그만큼 사람들이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좋은 정서를 주고 싶어요. 어제도 어떤 꼬마가 공연하는 것 보고 ‘아저씨, 저 가수 할래요.’ 하는 거예요. 감동받았었나 봐요. 그래서 좀더 돈이 생기고 하면 큰 차에 공연장비 싣고 지방 다니면서 공연하고 싶어요. 꼭 돈 받고 하는 게 아니라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거요. 외국에는 많잖아요.
어젠 기분이 좀 나빴던 게 한강 고수부지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경찰이 와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휴,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문화 혜택을 누릴 수가 없는 거예요. 한강인데 어때요. 사람들 다 좋아하고 그러는데 안 된다고 가져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돈을 더 벌면 거리공연에 집중하고 싶어요.
정선 5일장에 가서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면서 새로운 기분 정서를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싶었어요.

personweb.gif\" 메이저 가수, 모든 사람들이 알아봐주는 가수가 되고 나서 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강> 뭐, 앨범 홍보하다가 알아보니까 좋긴 하더라고요.

personweb.gif\" 그게 더 좋다고 생각하세요?
강> 더 좋다기 보단 나는 모르는데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묘한 기분이 드는데 모두가 알아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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